대한시니어연합신문 뉴스추천뉴스2026. 4. 18. 오후 12:16:05

동화 할아버지가 보내는 일주일

김상태 작가
동화 할아버지가 보내는 일주일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어디에서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남은 시간을 조금 더 편안하고, 조금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면 비로소 하루의 속도, 함께하는 사람의 소중함,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서울 잠실을 떠나 아이들이 사는 수원 가까운 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동기에서 인터넷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처음 알게 된 곳이 바로 ‘봉담’이었다. ‘봉담’은 내가 처음 들어보는 작은 읍 소재지였다. 어떤 곳인지 한번 가보자고 아내와 함께 네비게이션을 켜고 찾아갔다. 

수원에서 차로 20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막상 도착해 보니, 조용하고 깨끗한 아파트 단지들이 눈에 들어왔고,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만큼 상가도 제법 형성되어 있었다. 첫인상은 “살기에 괜찮겠다”라는 것이었다.

성당에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 부근의 부동산에 들어가 전세를 알아보았다. 2년쯤 살아본 뒤 집을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전세 물건이 한 군데도 없었다. 

혹시 물건이 나오면 연락을 달라고 부탁해 두고 돌아왔는데, 2주쯤 지나 정말로 전화가 왔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어느덧 15년이 되었다. 

서울에서 친구들 모임이나 친인척 결혼식이 있을 때면 다소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기는 한다. 그래도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만에 사당역까지 갈 수 있으니 아주 불편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이곳에 정이 들었다. 조용하고 공기 좋은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게 된 것이 참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내가 보내는 일주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날들 속에도 나름의 기쁨과 의미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월요일과 화요일 오전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복지관 당구장에서 보낸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읍내 체육센터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탁구를 즐겼다. 그러나 시합에서는 매일 탁구장에 나와 사는 친구들을 당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차츰 흥미가 줄어들 무렵, 학창 시절 배웠던 당구에 다시 마음이 끌렸다.

요즘은 주로 4구를 친다. 처음에는 200을 놓고 치다가 게임에서 이기는 횟수가 너무 많아져 이제는 250으로 올려놓고 친다. 처음에는 감각에 의존해 큐를 움직였지만, 유튜브를 통해 두께와 회전을 조절하여 공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하나씩 익혀 가다 보니, “당구는 과학이다”라는 말이 실감 난다.  

큐의 속도 하나, 맞는 지점 하나에 따라 공의 길이 달라지고, 생각지 못한 변수도 생긴다. 그래서 어렵다. 그러나 어쩌면 그 어려움 때문에 더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골프가 그렇듯 당구 역시 뜻대로 되지 않는 변수가 주는 묘미가 있다. 그래도 마음먹은 대로 공이 굴러가 점수로 이어질 때면 짜릿한 즐거움이 밀려온다. 당구장에 가는 날이면 발걸음이 절로 빨라지는 이유다.

수요일은 가능하면 집에서 지낸다. 아내는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 늘 집안일을 힘겹게 감당한다. 손목에 힘이 없어 병마개도 잘 열지 못하고, 냉장고 속 유리그릇이 무거워 꺼내지도 못한다. 높은 선반에 있는 그릇은 손도 대지 못한다. 

병원에 갔더니 회전근개 파열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나이 때문에 수술도 쉽지 않으니 조심하며 지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까지 곁에서 도와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외출하더라도 오전에만 하고, 오후에는 꼭 집에 머물며 아내 곁을 지키려고 한다. 젊은 날의 사랑이 설렘이었다면, 늙어서는 돌봄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새삼 더 배우게 된다. 

목요일 오전에는 복지관에서 캐리커처를 배운다. 수업은 10시에 시작되지만, 조금 일찍 나가 한 시간쯤 당구장에서 게임을 하고 들어간다. 캐리커처는 사람 얼굴의 특징을 포착해 과장되게 표현하는 그림이다. 

스케치부터 하고, 붓펜으로 선을 살리고, 마지막에 파스텔로 색을 입히는 과정이 제법 흥미롭다.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고, 평소에는 지나치던 표정의 개성과 매력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마음을 늙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쓴이가 그린 캐리커처 작품

 

목요일 저녁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밤 8시 30분부터 10시까지 영어 해석을 공부하는 모임이 있다. 해외 영어신문에서 발췌한 교재를 미리 받아 틈틈이 예습해 둔다. 

그리고 화상회의 플랫폼으로 화상통화를 하며 한 페이지씩 돌아가면서 해석하고 의견을 나눈다. 영어 공부도 공부지만, 그 안에 담긴 시사 뉴스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접하는 재미가 적지 않다. 

몇 달 전, ‘고교 동창회보’에 실린 내 글을 관심 있게 읽었다는 순천 사는 후배에게서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동창회보로 이어진 그 인연 덕분에 지금은, 영어 실력이 뛰어난 그 후배와 함께 매주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사람과의 만남과 배움이 이어질 때 삶은 여전히 신선하다는 것을 느낀다.

금요일은 내 일주일 가운데 가장 환한 날이라고 해도 좋다. 집 근처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읍내 도서관에서 동화구연 강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도 있어, 배워 두면 손자에게 동화를 들려줄 때 좋겠다는 마음으로 등록했다. 그런데 동화구연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말로만 들려주면 쉽게 싫증을 내기 때문에, 부직포를 오리고 글루건으로 붙이고, 바느질로 여러 소품을 만들어야 했다. 교육의 절반쯤은 이런 작업으로 채워졌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교육을 담당했던 강사가 실습을 권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니 꼭 현장에서 실습해 보라고 했다. 마침 내가 다니는 성당 옆에는 수녀원이 있고, 그 안에 부설 유치원이 있었다. 

실습을 해 보고 싶다고 원장 수녀님께 말씀드렸더니, 마침 동화구연 선생님을 찾고 있었는데 잘 되었다며 다음 주부터 바로 시작해 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유치원을 바꾸어가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끔 어떤 아이는 “할아버지는 왜 머리가 조금밖에 안 났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물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도 “동화 할아버지 오셨어요”라고 하며 반갑게 달려와 매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그저 웃음이 난다. 

아이들의 맑은 눈빛 앞에서는 누구나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질 것이다. 나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이 봉사는 내게 참 소중하고도 즐거운 일이다.

토요일은 수요일과 비슷하다. 특별한 외출 없이 집에서 아내의 집안일을 돕고, 다음 주 영어 공부를 준비하며 지낸다. 분주하고 요란한 하루는 아니지만, 이런 날들이야말로 삶을 조용히 붙들어 주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일요일에는 아내와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한다. 그러고 나면 또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흘러간다. 그러다 보면 문득 눈을 감아야 할 때도 올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때까지 내게 주어진 날들을 너무 무겁지도, 너무 허투로도 보내지 않고 싶다. 

조용한 마을에 정착하여, 당구공의 경쾌한 굴림 속에서 작은 기쁨을 배우고, 아픈 아내 곁을 지키며 사랑의 무게를 익히고, 캐리커처와 영어 공부로 마음의 창을 열어 두며,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며 순수한 웃음을 주고받는 삶이 나의 일주일이고 일상이다. 

천상병 시인이 쓴 것처럼, 언젠가 인생이라는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 온다면, 나 역시 웃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삶은 거창한 성공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는 일만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삶은 아주 작고 평범해 보이는 일들 속에서 조금씩 깊어지고, 그렇게 깊어진 시간이 모여 한 사람의 품격과 향기를 만들어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아껴주고, 늦은 나이에도 배움을 멈추지 않으며, 도움이 필요한 이의 곁에서 조용히 손을 내밀고, 주어진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일이 내 삶의 의미다. 내 생각에는 인생의 참된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데서 피어난다고 본다.

젊은 날에는 더 크고 더 눈부신 것을 꿈꾸며 달려왔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인생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에 스며 있는 정성과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곁을 지켜 주는 일, 함께 밥을 먹고 안부를 묻는 일, 배우는 기쁨을 잃지 않는 일, 아이들의 웃음 앞에서 함께 웃어 주는 일, 그리고 오늘 해야 할 몫을 묵묵히 감당하는 일이야말로 삶을 가장 단단하고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고, 언젠가는 모두 인생의 저녁 무렵에 이르게 된다. 그때 돌아보았을 때 내 삶이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따뜻했다고, 눈부시지는 않았어도 정겹고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안이 있고, 사랑과 배움과 섬김으로 채운 시간만이 남길 수 있는 온기가 있다. 

이런 뜻에서 내가 보내는 이 평범한 일주일은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늦은 나이에 비로소 천천히 읽게 된 삶의 뜻이며, 조용히 배워 가는 사랑의 문장들이고, 세월 끝에서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한 편의 이야기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늦게 배운 가장 따뜻한 동화 한 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장을 덮는 날, 그 동화의 끝머리에 조용한 미소로 이렇게 적을 수 있으면 좋겠다. “참으로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고마운 삶이었다”라고 말이다.

김상태 작가
김상태 작가
joelkim7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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