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시니어연합신문 뉴스추천뉴스2026. 4. 4. 오후 7:38:10

장독대와 인생

박시우 작가
장독대와 인생

봄을 단순히 계절의 전환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봄은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묵혀두었던 것을 꺼내며, 앞으로의 시간을 설계하는 출발선이다. 자연이 그러하듯, 사람의 삶 또한 이 시기에 맞춰 정비하고 새롭게 방향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이 늦겨울에서 초봄 사이에 장을 담갔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은 아무 때나 담그지 않는다. 기온이 너무 높으면 잡균이 번식하고, 공기가 습하면 메주가 제대로 뜨지 않는다. 반대로 너무 추우면 발효가 더디다. 그래서 선택된 시기가 바로 겨울 끝자락과 봄의 문턱이다. 차갑지만 맑은 공기, 그리고 점차 따뜻해지는 기온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장은 제대로 익어간다. 이는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오랜 세월 축적된 삶의 지혜다.

된장, 간장, 고추장은 한 끼 식사의 부속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 해 식탁의 토대이자 가족의 건강을 지탱하는 근간이다. 장독대는 단순한 저장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 기다림이 쌓이는 장소였다. 그 안에서 장은 천천히 발효되며 깊은 맛을 만들어낸다. 빠르지 않지만, 그 느림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가치가 만들어진다.

이쯤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장독대’가 존재하는가.
현대의 삶은 속도를 미덕으로 삼는다. 빠르게 배우고, 빠르게 성취하고, 빠르게 소비한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환경 속에서, 오히려 깊이는 사라지고 있다. 인스턴트 음식이 편리함을 주는 대신 건강을 해칠 수 있듯, 인스턴트식 삶은 성취를 주는 대신 내면의 단단함을 잃게 만든다.

장독대는 기다림의 상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묵묵히 변화를 견디며, 결국은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간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계획은 바로 결과를 내지 못한다. 어떤 노력은 오랜 시간 묻혀 있어야 비로소 의미를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견디는 힘과 그 과정을 믿는 태도다.

우리는 종종 삶의 장독대를 방치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당장의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이미 늦었다는 생각으로 덮어두기만 한다. 그 결과, 장독대는 비어 있거나, 균형을 잃거나, 심지어는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삶의 맛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지금이야말로 이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시기다. 내 삶에는 무엇이 발효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담가두었고, 무엇을 방치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과정이 건강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봄은 여전히 우리에게 기회를 준다. 자연이 해마다 장을 담글 수 있는 시기를 허락하듯, 삶 또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준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알아보고 붙잡는 일이다.

이 봄, 단순히 계절을 맞이하는 데 그치지 말고, 삶을 위한 ‘장 담그는 철’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서두르지 않되, 성실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도 의미 있게 채워가며, 나만의 장독대를 다시 세워가는 일이 필요하다. 인생의 깊이는 얼마나 빠르게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발효되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박시우 작가
박시우 작가
psy@newsnetp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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